열다섯 살 딸이 오디션에 붙었습니다. 기획사가 내민 연습생 계약서에는 계약 기간 7년, 주 5일 이상 연습 참여, 중도 해지 시 그동안의 교육비를 물어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기회를 놓칠까 봐 그 자리에서 법정대리인 칸에 서명했습니다. 정작 딸은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도 못했고, 집에 와서는 학교 생활과 병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울었습니다. 친권자가 서명했으니 이 계약은 이미 딸을 묶은 것일까요. 민법 제920조는 친권자의 대리권을 인정하면서도, 바로 이런 계약에는 단서를 붙여 두었습니다.
친권자는 자녀 대신 무엇이든 계약할 수 있나
제920조 본문은 법정대리인인 친권자가 자녀의 재산에 관한 법률행위에 대해 자녀를 대리한다고 정합니다. 자녀 명의 통장, 자녀가 물려받은 부동산, 자녀가 받은 보험금 같은 것을 관리하고 처분하는 일이 대표적입니다.
문제는 계약의 중심이 돈이 아니라 자녀의 행동일 때입니다.
연습생 계약에서 딸이 지는 의무는 연습에 나가고, 기획사가 정한 일정에 맞춰 활동하는 것입니다. 딸의 시간과 몸이 계약의 목적이 됩니다. 제920조 단서는 이런 경우를 따로 떼어, 친권자가 대리하더라도 본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자녀의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채무
자녀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의무를 말합니다. 연습 참여, 공연·방송 출연, 광고 촬영처럼 자녀가 직접 움직여야 이행되는 계약상 의무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친권자가 이런 채무를 자녀 이름으로 부담하려면 자녀 본인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딸의 동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조문은 동의의 방식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말로 한 동의도 동의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툼이 생기면 딸이 무엇에 동의했는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계약 기간이 몇 년인지, 일주일에 몇 번 연습하는지, 그만두면 무엇을 물어내야 하는지를 딸이 알고 받아들였다는 흔적이 남아야 합니다. 계약서 끝에 친권자 서명과 별도로 미성년자 본인 확인란을 두고 딸이 직접 서명하는 방식이 가장 깔끔합니다.
열다섯 살이면 계약 기간이나 위약금이 무슨 뜻인지 설명을 들으면 충분히 따져 볼 수 있는 나이이고, 그만큼 딸의 뜻을 건너뛸 이유도 줄어듭니다. 엄마가 기회를 놓치기 싫은 마음과 딸이 그 생활을 감당하고 싶은 마음은 다를 수 있고, 조문은 뒤의 것을 따로 묻도록 짜여 있습니다.
| 계약의 모양 | 친권자 혼자 할 수 있나 | 필요한 것 |
|---|---|---|
| 자녀 명의 예금 해지, 자녀 소유 물건 매매처럼 재산에 관한 행위 | 대리 가능 | 이해상반이면 특별대리인 |
| 연습·공연·촬영 등 자녀가 몸으로 해야 하는 의무를 지는 계약 | 대리는 가능하나 단독으로는 부족 | 자녀 본인의 동의 |
| 근로계약의 성질을 띠는 계약 | 대리 불가 | 자녀가 직접 체결 (법정대리인 동의) |
| 자녀가 직접 서명한 계약 | 해당 없음 | 법정대리인 동의, 없으면 취소 가능 |
연습생 계약이 사실상 근로계약이라면
여기서 한 번 더 갈라집니다.
근로기준법 제67조 제1항은 친권자나 후견인이 미성년자의 근로계약을 대리할 수 없다고 정합니다. 동의를 받든 받지 않든 대리 자체가 막혀 있다는 뜻입니다.
연습생 계약이 모두 근로계약은 아닙니다. 교육을 받는 쪽에 가까운 계약도 있고, 기획사의 지휘를 받으며 일정한 활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구조라면 근로계약의 성질이 짙어집니다. 계약서의 이름보다 실제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받는지가 기준입니다.
근로계약으로 보이는 경우라면 딸이 직접 계약하고 친권자가 동의하는 순서가 맞습니다. 미성년자는 독자적으로 임금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계약이 미성년자에게 불리하면 친권자가 해지할 수도 있습니다. 사용자는 18세 미만인 사람과 근로계약을 맺을 때 근로조건을 서면으로 명시해 내주어야 하고, 18세 미만 근로자의 친권자 동의서를 사업장에 갖춰 두어야 합니다.
딸의 동의 없이 서명한 계약은 어떻게 되나
제920조 단서를 지키지 않은 대리는 권한을 넘은 대리가 됩니다. 실무에서는 이 경우 그 채무 부분이 딸에게 효력이 없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한 없는 사람이 남을 대신해 맺은 계약은 그 사람이 나중에 인정해 주지 않는 한 그를 묶지 못한다는 무권대리 규정과 같은 흐름입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기획사는 딸이 연습에 나오기 시작했으니 사실상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딸이 계약 내용을 알게 된 뒤에도 아무 말 없이 연습을 이어 가면 그런 주장에 힘이 실립니다.
계약을 이어 갈 생각이 없다면 이렇게 움직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 계약서 사본과 서명 당시 상황을 정리합니다.
- 딸이 계약 조건을 듣지 못했고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서면으로 기획사에 알립니다.
- 교육비·위약금 청구가 들어오면 그 근거와 산정 내역을 서면으로 요구합니다.
- 근로계약의 성질이 있다면 그 점도 함께 다툽니다.
부모 의견이 갈리거나 이혼한 사이라면
부모가 혼인 중이면 친권은 공동으로 행사합니다. 한쪽이 공동명의로 자녀를 대리했다면 다른 쪽이 반대하더라도 효력이 있는 것이 원칙이고, 상대방이 그 반대를 알았을 때에만 예외가 됩니다.
공동명의 규정이 있어도 딸의 동의라는 요건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모두 서명했어도 딸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같은 문제가 남습니다.
이혼 뒤 한쪽이 단독 친권자가 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독 친권자가 친권을 남용해 아이의 복리를 현저히 해친다면 친권의 일시 정지를, 부적당한 관리로 아이 재산을 위태롭게 한다면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의 상실을 가정법원에 청구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 전 단계로 양육자와 친권자 문제를 다시 정리하는 협의가 먼저입니다.
주의
딸이 계약서에 직접 서명했고 친권자 동의가 없었다면 문제는 다른 쪽으로 옮겨 갑니다. 딸이 혼자 서명하고 부모 동의가 빠졌다면 민법 제5조의 취소 문제가 됩니다. 취소는 추인할 수 있게 된 때부터 3년, 계약일부터 10년이라는 기한 안에 해야 합니다.
정리
친권자는 자녀의 재산에 관한 계약을 대리할 수 있지만, 연습생 계약처럼 자녀가 직접 무언가를 해야 하는 채무를 지울 때에는 자녀 본인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근로계약의 성질을 띤다면 친권자가 대리하는 것부터 막혀 있습니다.
계약서에 딸의 확인 서명이 있는지, 실제 활동이 교육인지 노무인지, 위약금이 어떤 근거로 계산되는지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이미 서명한 계약을 정리해야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상 동의했다는 주장이 강해지니, 서면 통지 전에 변호사와 문구를 함께 다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4조, 제5조, 제130조, 제140조, 제146조, 제909조, 제920조, 제920조의2, 제924조, 제925조 · 근로기준법 제67조, 제6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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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부모가 서명했으면 미성년 자녀의 연습생 계약은 유효한가요?
친권자는 자녀의 재산에 관한 법률행위를 대리할 수 있지만, 연습 참여나 출연처럼 자녀의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채무를 부담할 때에는 본인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자녀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 부분의 효력이 문제됩니다.
자녀 동의는 꼭 서면으로 받아야 하나요?
민법은 동의의 방식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툼이 생겼을 때 자녀가 계약 기간, 의무, 위약금 조건을 알고 동의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도록 자녀 본인의 확인 서명을 받아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연습생 계약도 근로계약으로 볼 수 있나요?
계약서 이름보다 실제 내용이 기준입니다. 기획사의 지휘를 받으며 활동하고 그 대가를 받는 구조라면 근로계약의 성질이 짙어지고, 그 경우 근로기준법상 친권자는 미성년자의 근로계약을 대리할 수 없습니다.
한쪽 부모만 서명했는데 다른 부모가 반대합니다.
공동친권자 일방이 공동명의로 한 대리는 다른 일방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효력이 있는 것이 원칙이고, 상대방이 악의일 때만 예외입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자녀 본인의 동의 요건은 그대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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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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