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을 취소하는 판결을 받아 내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제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민법은 취소 판결 뒤에 남는 일들을 처리하려고 세 개의 조문을 나란히 붙여 두었고, 그 조문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과거를 지우는 쪽이 아니라 지나간 기간을 인정한 채 정리하는 쪽입니다. 판결 이후에 실제로 무엇이 남고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조문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세 조문이 한 묶음으로 놓여 있다
제824조와 제824조의2, 제825조는 서로 이어 읽어야 뜻이 잡힙니다.
앞의 조문이 취소의 효력이 미치는 시간의 범위를 정하고, 가운데 조문이 자녀에 관한 처리를 이혼 쪽 규정에 맡기며, 뒤의 조문이 돈 문제를 약혼 해제의 규정으로 연결하니, 세 칸이 각각 시간과 자녀와 배상을 하나씩 맡고 있는 셈입니다.
순서가 곧 실무의 순서이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부부가 아닌지를 먼저 정해야 자녀와 재산의 처리가 계산되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기간은 왜 남기나
조문은 취소의 효력이 이미 지나간 일에까지 미치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경계선은 판결이 확정된 때입니다. 그 앞쪽은 손대지 않고 뒤쪽만 바꾼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어렵지 않은데, 혼인이 계약 한 건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에 아이가 태어나고, 집을 사고, 보험에 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는 사돈이라는 관계가 새로 생겼습니다. 판결 한 장으로 그 전부를 없던 일로 돌리면 잘못이 없는 제삼자까지 함께 흔들립니다. 그래서 법은 흠 있는 혼인을 없애되 그 흔적은 남겨 두는 방식을 골랐습니다.
무효와 취소
무효는 애초에 효력이 생기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고, 취소는 일단 생긴 효력을 재판으로 없애는 것입니다. 혼인에서는 두 제도의 사유가 제815조와 제816조로 나뉘어 있고, 뒤쪽에는 청구권자와 기간 제한이 조문마다 따로 붙어 있습니다.
아이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 대목입니다.
취소의 효력이 과거로 가지 않으므로 혼인 기간 중에 태어난 아이는 혼인 중의 출생자라는 지위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출생신고가 다시 문제 되지 않고, 아버지와의 법률상 관계도 그대로입니다. 상속의 순위와 몫에도 영향이 없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친권을 누가 행사하느냐입니다. 제909조 제2항은 부모가 혼인 중일 때 친권을 공동으로 행사하게 하는데, 혼인이 풀리면 그 전제가 사라집니다.
그 공백을 같은 조 제5항이 메웁니다. 혼인의 취소와 재판상 이혼, 인지청구의 소에서는 가정법원이 직권으로 친권자를 정합니다. 당사자가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법원이 스스로 판단한다는 뜻이어서, 심리 과정에서 양육 환경에 관한 자료를 미리 갖추어 두는 편이 유리합니다.
양육과 면접은 어떤 기준으로 정하나
제824조의2가 그 일을 맡습니다. 자녀의 양육책임과 면접교섭권에 관하여 이혼 쪽 두 조문을 그대로 끌어다 쓰도록 했습니다.
끌어다 쓰는 조문 가운데 제837조 제2항은 협의에 담아야 할 세 가지를 적어 두었습니다.
- 양육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
- 양육비용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 면접교섭권을 행사할 것인지와 그 방법
협의가 아이의 복리에 어긋나면 같은 조 제3항에 따라 법원이 보정을 명하거나 직권으로 정합니다. 협의 자체가 되지 않을 때에는 제4항이 작동합니다. 가사소송법은 이 처분을 마류 가사비송사건으로 두면서 혼인의 취소를 원인으로 하는 경우를 명시적으로 포함시켜 두었습니다.
재산은 나눌 수 있나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민법의 재산분할 조문은 협의상 이혼을 전제로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이 취소된 사안에서는 쓸 수 없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답은 절차법에 있습니다. 가사소송법 제2조 제1항은 마류 가사비송사건을 열거하면서 재산 분할에 관한 처분 항목에 혼인의 취소를 원인으로 하는 경우를 포함한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함께 모은 재산을 정산하는 길이 조문으로 열려 있는 셈입니다.
지나간 혼인 기간을 남겨 둔 제824조의 구조와도 맞물립니다. 부부로 지낸 시간이 있었다고 보는 이상 그 기간에 쌓인 재산을 나누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배상은 누구에게 구하나
제825조가 통로를 열어 둡니다. 혼인이 무효이거나 취소된 경우에 약혼 해제에 관한 제806조를 가져다 쓰도록 했습니다.
그 조문의 제1항은 과실 있는 상대방에게 손해의 배상을 구할 수 있게 하고, 제2항은 재산상 손해 외에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도 인정합니다. 혼인적령을 속였거나 중혼 사실을 감춘 사안에서 이 항이 쓰입니다.
상대가 배우자 한 사람으로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가사소송법은 혼인의 무효와 취소를 원인으로 하는 손해배상청구를 다류 가사소송사건으로 두면서 제3자에 대한 청구를 포함한다고 적었습니다. 혼인을 성립시키는 과정에 관여해 속임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면 함께 상대로 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을 구하는 권리에는 제806조 제3항의 제한이 붙습니다. 원칙적으로 남에게 넘기거나 상속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당사자 사이에 배상에 관한 계약이 이미 이루어졌거나 소를 제기한 뒤라면 그렇지 않습니다. 권리자가 고령이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사안에서는 이 단서가 실제로 문제 됩니다.
무효였다면 무엇이 달랐을까
결과가 꽤 달라집니다.
혼인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다루어지면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혼인 밖의 출생자가 되고, 아버지 쪽과의 관계는 인지라는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재산분할에 관하여도 마류 사건 목록에는 취소만 적혀 있습니다.
배상 쪽은 반대로 두 경우를 함께 묶었습니다. 제825조의 문장에 무효와 취소가 나란히 들어가 있고, 가사소송법의 다류 사건 항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 사안이 어느 칸에 들어가는지를 먼저 확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유가 제815조인지 제816조인지에 따라 뒤따르는 절차가 통째로 갈립니다.
확인할 것
· 문제가 된 사유가 무효 사유인지 취소 사유인지
· 혼인신고가 수리된 날과 자녀의 출생일 사이의 간격
· 혼인 기간에 취득한 재산의 명의와 취득 시점
· 속임에 관여한 제삼자가 있는지와 그 역할을 보여 줄 자료
정리
혼인이 취소되어도 그때까지의 기간은 남습니다. 아이는 혼인 중의 출생자로 그대로 다루어지고, 친권자는 법원이 직권으로 정합니다. 양육과 면접교섭은 이혼 쪽 규정을 준용해 정하며, 재산분할도 혼인의 취소를 원인으로 청구할 수 있습니다.
배상은 과실 있는 상대는 물론 속임에 가담한 제삼자에게도 구할 수 있고, 정신적 고통에 대한 부분에는 양도와 승계의 제한이 붙습니다. 판결만 받아 두고 나머지를 미루면 몇 해 뒤에 같은 법원을 다시 찾게 되니, 자녀와 재산, 배상을 한 번에 정리하도록 변호사와 순서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806조, 제815조, 제816조, 제824조, 제824조의2, 제825조, 제837조, 제837조의2, 제909조 · 가사소송법 제2조
이 유형의 사건은 초기 대응 시점이 결과를 좌우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 후회하시기보다, 의문이 생기는 그 시점에 변호사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법무법인 대한중앙 한병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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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혼인이 취소되면 아이의 성과 본도 바뀌나요?
취소의 효력이 과거로 미치지 않으므로 혼인 중의 출생자라는 지위가 유지되고 성과 본도 그대로입니다. 변경이 필요하다면 자녀의 성과 본에 관한 별도의 허가 절차를 밟게 됩니다.
친권자를 정해 달라고 따로 신청해야 하나요?
혼인의 취소 사건에서는 가정법원이 직권으로 친권자를 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양육 환경과 자녀의 의사에 관한 자료는 미리 제출해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혼인 기간이 짧아도 재산분할을 구할 수 있나요?
기간의 길이가 청구 자체를 막지는 않습니다. 다만 함께 모은 재산이 있는지와 기여의 정도가 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하는 기준이 되므로 취득 시점과 명의를 정리해 두십시오.
속인 사람이 배우자가 아니라 중개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혼인의 취소를 원인으로 하는 손해배상은 제3자에 대한 청구를 포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 줄 계약서와 대화 기록을 모아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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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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