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진단을 받은 아버지의 성년후견인은 큰딸이었습니다. 몇 달 뒤 동생들은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옛 동업자에게서 큰누나가 그 채권을 넘겨받았고, 넘겨받은 값보다 훨씬 많은 돈이 아버지 예금에서 큰누나 계좌로 빠져나갔다는 것입니다. 큰누나는 원래 갚아야 할 빚을 갚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만은 아니지만 민법은 이런 거래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후견인이 피후견인에 대한 남의 권리를 사들이는 일을 따로 떼어 규율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빚을 대신 사 준 것이 왜 문제가 되나
얼핏 보면 가족이 나서서 남에게 진 빚을 정리해 준 모양입니다. 문제는 사들인 사람이 후견인이라는 데 있습니다.
후견인은 피후견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그 재산에 관한 법률행위를 대리합니다. 아버지 예금에서 누구에게 얼마를 갚을지 정하는 사람이 바로 후견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버지의 채권자가 되면, 갚는 쪽과 받는 쪽이 한 사람 손에 들어갑니다.
채권은 액면보다 싸게 거래되는 일이 흔합니다. 오래 묵은 빚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후견인이 싸게 사들인 뒤 피후견인 재산에서 액면 그대로 받아 가면 그 차익은 고스란히 후견인 몫이 되고, 손실은 피후견인이 떠안습니다. 이자나 지연손해금을 얼마로 계산할지, 소멸시효를 주장할지 같은 판단도 후견인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민법은 이 거래를 어떻게 다루나
민법 제951조는 후견인이 피후견인에 대한 제3자의 권리를 양수하는 경우 피후견인이 이를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후견감독인이 있다면 후견인은 양수 전에 그 동의를 받아야 하고, 동의 없이 양수하면 피후견인이나 후견감독인이 취소할 수 있습니다.
무효가 아니라 취소할 수 있는 거래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취소하기 전까지 채권은 후견인에게 넘어간 상태로 유지됩니다. 결과가 피후견인에게 나쁘지 않다면 그대로 두는 선택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고리의 빚을 가족이 사들이고 이자를 받지 않기로 했다면 굳이 되돌릴 이유가 없을 수 있습니다.
| 상황 | 후견인이 채권을 사들이기 전에 할 일 | 취소할 수 있는 사람 |
|---|---|---|
| 후견감독인이 선임되어 있음 | 후견감독인의 동의를 받아야 함 | 피후견인, 후견감독인 |
| 후견감독인이 없음 | 동의 절차 없음 | 피후견인 |
| 한정후견 | 같은 규정이 준용됨 | 피한정후견인, 한정후견감독인이 있으면 그 감독인 |
| 특정후견 | 이 조항이 준용 목록에 없음 | 이 규정으로는 취소 불가 |
표의 마지막 줄은 놓치기 쉽습니다. 특정후견의 사무에 준용되는 조문 목록에는 이 조항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취소권은 누가 실제로 쓸 수 있나
여기서 제도의 빈틈이 드러납니다.
법문상 취소권자는 피후견인입니다. 그런데 성년후견을 받는 아버지가 스스로 취소 의사를 표시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고, 아버지를 대리할 법정대리인은 바로 채권을 사들인 큰딸입니다. 자기 거래를 자기가 취소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후견감독인의 존재가 결정적입니다. 민법은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이해가 부딪치는 행위에서는 후견감독인이 피후견인을 대리한다고 정하고, 제951조도 감독인에게 직접 취소권을 줍니다. 감독인이 없다면 친족이 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감독인 선임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동생들 본인이 감독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후견인의 배우자, 직계혈족, 형제자매 같은 가족은 후견감독인 결격이기 때문입니다. 법원이 전문가나 가족 밖의 사람을 선임하게 됩니다.
취소하면 아버지의 빚도 사라지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오해하면 계획이 어긋납니다.
취소된 법률행위는 처음부터 무효였던 것으로 봅니다. 취소되는 것은 채권을 넘겨받은 거래이지 아버지가 옛 동업자에게 돈을 빌린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채권은 원래 채권자에게 남아 있던 것이 되고, 아버지의 빚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 대신 큰딸이 아버지 재산에서 받아 간 돈의 정리 문제가 생깁니다. 채권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받아 간 돈이 되므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지고, 큰딸이 옛 동업자에게 치른 양수 대금은 두 사람 사이에서 따로 정리할 몫이 됩니다. 아버지 쪽에서 보면 원래 채권자에게 정당한 금액만 갚는 상태로 돌아가는 셈입니다.
요컨대 취소의 목적은 빚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후견인이 챙긴 차익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언제까지 불안한 상태로 기다려야 하나
채권을 넘긴 사람 입장에서는 거래가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상태가 부담입니다. 민법은 제952조에서 제한능력자의 상대방이 쓰는 확답 촉구 규정을 이 거래에 끌어다 씁니다.
상대방은 1개월 이상의 기간을 정해 추인할지 여부를 답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피후견인이 아직 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그 요구는 법정대리인에게 합니다. 정해진 기간 안에 확답이 없으면 추인한 것으로 봅니다. 다만 특별한 절차가 필요한 행위는 그 절차를 밟은 확답이 없으면 취소한 것으로 보는 규정도 함께 준용되므로, 후견감독인의 동의가 필요했던 거래라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주의할 대목은 앞쪽입니다. 확답 요구가 법정대리인인 큰딸에게 가고 큰딸이 답하지 않으면 거래가 그대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감독인 선임을 서둘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가족은 지금 무엇부터 해야 하나
취소권에는 기간이 있습니다. 추인할 수 있는 날부터 3년, 거래한 날부터 10년 안에 행사해야 하고, 어느 날을 기산점으로 볼지는 다툼이 생길 수 있으므로 알게 된 즉시 움직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 채권양도 통지서, 양도 계약서, 양수 대금을 치른 이체 내역을 확보합니다.
- 아버지 계좌에서 큰딸 쪽으로 나간 돈의 날짜와 금액을 표로 정리합니다.
- 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감독인 선임을 청구합니다.
- 필요하면 가정법원에 아버지의 재산상황 조사와 후견인에 대한 처분을 함께 구합니다.
- 후견인을 바꿔야 할 정도라면 후견인 변경 청구도 검토합니다.
가정법원의 후견사무 처분
가정법원은 직권으로 또는 피후견인, 후견감독인, 친족, 이해관계인, 검사,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청구를 받아 피후견인의 재산상황을 조사하고 후견인에게 재산관리에 필요한 처분을 명할 수 있습니다. 감독인이 선임되기 전이라도 친족이 바로 쓸 수 있는 통로입니다.
정리
후견인이 피후견인에 대한 남의 채권을 사들이면 피후견인이나 후견감독인이 그 거래를 취소할 수 있습니다. 취소해도 원래의 빚은 남고, 되돌아가는 것은 후견인이 채권을 싸게 사서 얻은 차익입니다.
실제로 취소권을 쓸 사람은 대개 후견감독인이므로, 감독인이 없다면 선임 청구부터 하십시오. 자료 확보와 청구 순서는 기간이 걸린 문제라 변호사와 함께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15조, 제140조, 제141조, 제146조, 제779조, 제940조, 제940조의4, 제940조의5, 제940조의6, 제949조, 제951조, 제952조, 제954조, 제959조의6, 제959조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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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후견인이 아버지 빚을 사들인 것 자체가 불법인가요?
곧바로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민법은 이 거래를 피후견인이나 후견감독인이 취소할 수 있는 행위로 정하고 있어, 결과가 피후견인에게 불리할 때 되돌리는 구조입니다.
형제인 제가 후견감독인이 되어 취소하면 안 되나요?
후견인의 형제자매는 후견감독인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법원에 감독인 선임을 청구하면 법원이 결격이 아닌 사람 가운데에서 선임합니다.
거래를 취소하면 아버지가 진 빚도 없어지나요?
없어지지 않습니다. 취소되는 것은 채권을 넘겨받은 거래이므로 빚은 원래 채권자에게 남고, 후견인이 아버지 재산에서 받아 간 돈을 정리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언제까지 취소해야 하나요?
취소권은 추인할 수 있는 날부터 3년, 거래한 날부터 10년 안에 행사해야 합니다. 기산점이 다퉈질 수 있으니 거래를 알게 된 즉시 감독인 선임 청구 등 절차를 시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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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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